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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화백과 여인

by 마e 2023. 2. 23.

eBook 소설

2023년 3월 2일 발행

정가 2,500원

 

책 소개 

나는 그림쟁이다. 나를 이렇게 낮추어 소개하는 데에는 근 이십 년 동안 그림을 그렸음에도 수상 경력도 없거니와, 잘 팔리지도 않는 그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내 그림을 받아주는 화랑이 있는 것은 신통방통하다. 어느 날 우연히 들렀던 화랑에서 여사장과 몇 마디 주고받다 쉬이 친분이 생겼고, 한번 그림을 가져와 보라는 배려에 힘입어 그림 몇 점을 들고 갔던 것인데, 내 그림을 보던 여사장은 뭔가 남다른 느낌이 있다며, 자신의 화랑에 몇 점 갖다놓고 싶다고 했다. 그러므로 내 그림이 내 집 밖을 나가 화랑이라는 공간에 있게 된 데에는 특별히 내 그림을 애호한 여사장의 개인적 선호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아니, 딱 한 번 팔렸다. 화랑의 여사장의 사촌 동생인 '이미호'라는 여자가 사갔기 때문이었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그 소식을 접했던 날에도, 나는 화실로 마련한 방에서 대형 캔버스에 붓질하고 있었다. 얼굴의 외곽선을 그리고, 그다음 몸체를 그리려는 찰라, 유선 전화벨 소리가 내 귓전에 따갑게 와 부딪쳤다. 나는 신세대적이기보다 구세대적이고, 더구나 옛날의 향수를 좋아해, 일부러 다이얼 형식의 전화기를 사다 놓았는데, 전화가 울릴 때마다 묘하게 기분 좋음을 느끼는 터였다.

잠시 잡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전화기 앞으로 가, 둔탁한 수화기를 잡아올려 귀에 대었다.

"「붉은 여자」그림 있잖아요?"

화랑의 여사장이 거두절미하고 다짜고짜 말했다.

"얼마면 되겠어요? 사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뜻밖이었다. 아니, 신기했다. 내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다? 누굴까? 어렴풋하게 감격에 휩싸인 나는 어름어름하다,

"사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라고 말해버렸다.

왜냐하면, 내 수준의 무명 화가가 받아야 할 그림 값을 잘 몰랐을뿐더러, 내 그림을 받아준 것만으로도 황송한 화랑의 여사장에게 이것저것을 요구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전화를 끊은 뒤, 마치 로또 복권에 당첨될 만한 꿈을 꾼 사람 모양 내 얼굴이 밝아져 있었다. 내내 닦지 않은, 방 한편에 걸어둔 거울 속 모습이 그랬다. 환희와 희망이 얼굴빛에 젊음을 부여한다는 사실도 새삼스레 느꼈다.

그날 저녁, 여사장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삼십만 원 불렀어요."

'삼십만 원씩이나?' 언젠가 그림 사기사건에 연루되었던 김우영 씨는 무명화가의 그림을 자신의 것으로 몰래 삼으면서 그림 한 장당 십만 원에서 이십만 원을 줬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물론 수백만 원이나 수천만 원에 거래되는 그림도 있지만, 지방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것 외에 우월한 학벌도, 경력도 없는 나로선 그저 별천지의 얘기가 아니겠는가.

이틀 후, 「붉은 여자」그림을 사간 사람이 화랑의 여사장의 사촌이며, 이름이 이미호라는 사실을 알았다.

"걔가 박 화백님 그림을 보더니, 너무 좋다고, 대뜸 사겠다고 하지 뭐예요."

 

저자 소개 | 서란

소설가. 감성적 언어의 작법, 로맨스 소설을 집필한다. 공상적이기보다 현실성 있는 전개를 좋아하며 즐겨 쓰는 편이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의 이기성 혹은 암울, 갈등, 내면성이 잘 표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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